사람들 떠나고 마을 이름만 남아집터는 경작지로 변해 흔적 ‘생생’부동산 열기에 토지 팔려나가
화전민 이용 마을 당 존재 확인"사라질 우려 속 관심 가져야"
원형과 삼각형 모양의 밭은 예전 오소록 마을 집터다. 지금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그 사이로 가운데 길게 휘어진 올레가 이어지고 주변 대나무가 무성한 곳 일대에 마을이 자리했다. 뒤에 보이는 오름은 금악이다. 특별취재팀.
[한라일보] 말 그대로 "오소록'한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다. 한림읍 금악리 '오소록이'는 지금은 이름만 남아 있는 옛 화전 마을이다. 비록 주민들은 떠나고 화전 농사는 더 이상 짓지 않아도 흔적은 생생하다. 수십 미터 이어진 올레와 집터와 널찍한 마당이 있었던 둥글고 세모꼴 모양의 밭 등이 취재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소록이 마을은 금악리 1445번지 일대에 형성됐다. 인근에는 4·3 잃어버린 마을인 웃동네가 있다. 해발 230m 정도로 한림읍에서는 산간지대에 속한다.
'오소록이'는 구석지면서 아늑한 곳에 있다는 제주어 '오시록호다'에서 마을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검은 매(오, 烏+소록이)가 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따왔다고 한다. '오시록호다'는 구석지고 고요하다는 의미의 제주어이다. "오시록헌디 꿩 독새기 난다." 는 제주 속담이 있다. 으슥한 곳에 꿩이 알을 낳는다는 의미다. 이곳 옛 마을터를 가면 '오시록'한 곳임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목초지와 경작지로 변한 밭을 따라 올레가 수십 미터 길게 이어지고 집담이 남아있다. 올레 주변과 집이 들어섰던 일대는 대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이 떠나고, 집터는 경작지로 바뀌어 콩, 목초 등을 재배하고 있다.
취재팀은 마침 예전 집터였던 곳을 일구어 콩 농사를 짓는 강창보(1951년 생) 어르신을 만났다. 증조부까지 130년 이상 화전 농사를 했다는 강 어르신은 자신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당시 주로 팥, 메일, 산디(밭벼)를 심었다고 했다.
집과 돗통시가 있던 곳을 설명하는 강창보 어르신. 특별취재팀
"주변 대나무가 자라는 곳은 모두 집터우다. 25가구가 살아나신디, 현재는 목초를 재배하면서 경계담도 사라졌고, 밭들은 전부 다른 사람들한테 팔려버려수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의 토지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부동산 열기로 이곳 토지들 대부분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현재 경작중인 밭(금악리 1446번지)에는 집이 있었고, 돗통시도 있었는데 50여 년 전 20대 때 농사를 짓기 위해서 없애수다"고 했다. 지금도 밭 입구 돌담에는 당시 벽체 재료로 썼던 흙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방애(불놓기)는 1960년대까지 이뤄졌다. 강 어르신은 "금악오름 주변에 촐(목초)이 좋았고, 진드기를 없애려 중학교 다닐 때까지 방애가 이뤄졌다"고 했다. 방애 후에는 주변 냇가까지 보일 정도로 주변이 탁 트였다고 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국영목장인 10소장 가운데 6소장 지역이다. 6소장 상잣성 위로는 화전동이 나타난다. 화전민들이 많았던 안덕면 동광, 광평 지역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1862년 '강제검의 난'과 1898년 '방성칠의 난' 때도, 봉기에 실패한 광평, 동광 등 산남지역 화전민 잔당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몇 년을 숨어 살았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오소록이 마을은 4·3때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 10가구 정도는 금악리 본동으로 갔고, 나머지는 주변 마을로 뿔뿔이 흩어졌다. 4·3이 끝나고 얼마 못가서 금악리에는 황폐화된 마을을 복구하기 위해 이재민 복구촌락이 들어섰다. 이후 오소록이 마을은 사람들이 살지 않으면서 잃어버린 마을이자, 잊혀진 마을이 됐다.
오소록 주민들이 다녔던 마을 당. 특별취재팀
이곳 마을터에서 200m 쯤 떨어진 곳에 오래된 마을 당이 있다. 예전 화전민들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도로변 입구 표지석에는 '금악 본향 ᄄᆞ신머들 축일 할망당'(일부 주민은 하르방당으로 보고, 할망당은 이곳과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마을에는 처녀당도 있다.)이라고 돼 있다. 농경신 정좌수의 딸이 좌정하여,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 손자 일흔여덟을 이웃마을들에 보내어 당신(堂神)으로 좌정토록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진입부를 따라 30여미터 정도 들어가면 신목인 거대한 구실잣밤나무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주변은 현무암으로 둘러쌓았고 신목 아래는 제단이 마련돼 있다. 가지에 걸린 물색이 바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다녀간 지 꽤 오래 됐을 것으로 보인다. 강 어르신의 할머니도 이 당에 다녔다고 했다. 가족을 잃고 마을 공동체가 사라지는 아픔 속에서 주민들은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고 안위를 걱정했다.
옛 화전마을 터 가까이에서 주민들의 민속신앙을 엿볼 수 있는 마을당을 확인한 것은 뜻밖이다. 취재팀은 그동안 탐사 과정에서 화전 마을 사람들이 이용했을 마을 당을 찾았으나 번번이 헛수고 했다.
진관훈 박사는 이 마을 당의 존재는 여러 가지를 말해 준다고 했다. 우선 오소록이 마을이 신앙적으로 안정된 마을이었으며, 다른 큰 마을과 같이 '본향당'이 아닌 급할 때 화전민 누구나 쉽게 찾는 '일뤳당'이었다는 점이다. 즉, 큰 마을과 달리 서너 가구 혹은 열 가구 미만 화전마을 특성을 반영한 효율적인 민속신앙체계였음을 말한다. 이와 함께 제주지역 화전(민)문화가 단순히 농업문화나 생활문화만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신앙 혹은 종교 문화가 역할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진 박사는 이어 '오소록이'에는 '알곳(알 화전)'이라는 자원의 보고, 곶자왈이 있으며 개인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비는 '할망당'이 있다. 이에서 보면 '오소록이'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탄탄하고 평온한 화전마을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마을 당의 제단. 특별취재팀.
중산간 지대 마을 당의 존재는 옛 화전민은 물론 주민들의 삶과 역사를 다양한 시각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들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지역민들 삶 속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화전 마을 공동체가 사라진 것처럼 지속적으로 명맥을 이어갈지는 불투명하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소중한 유산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보전 활용방안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행정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