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49)채밀-정희성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49)채밀-정희성
  • 입력 : 2024. 01.09(화) 00:00
  • 오은지 기자 ejoh@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동박새 꿀을 딴다

어느 문하인지 야만과 염치는

잘도 골라내고 목숨만큼만 딴다



하루해 새벽이면 녹아버리는 만나를 위하여

나는 무척 사금파리 길을 건너왔구나

나는 뱉어놓은 맹서와 작심을 위하여



직하의 순절은 얼마나 산뜻한가

필 만큼 피다 지는 목숨 앞에서

피는 값보다 지는 값을 쳐주는



동백꽃 붉은 저녁엔

부끄러움을 내다 넌다

삽화=써머



시인의 문장을 따라가면 곧게 내려가는 직하, 동백꽃은 숨이 다해 죽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습, 자기다움을 지키기 위해 죽는다. 그런 일생은 품이 많이 들겠지만, 산뜻함으로 다가오겠다. 그때 사금파리의 길을 걷게 한 숱한 맹세와 작심은 지고자 했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말해주면서 '만나'로 지칭되는 생활의 필요들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던 자신의 모습을 "야만"과 "염치" 쪽으로 돌려놓는다. 그렇다면 이걸 다 무엇이라 해야 하나. 과연 나는 어느 문하인가. 피었다 갈 때 "지는 값"을 잘 받고 싶은 정신이 바라보는 시선은 나이의 순서를 따르는 것은 아닐지라도 "동백꽃 붉은 저녁"이 오면 부끄러움이 찾아든다. 마음이 마음 자체로 돌아오는 시간이 있겠다. 옅은 타종 소리처럼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동백은 삶의 범위 안에서 손이 닿지 않는 꽃, 아닐까. <시인>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268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