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영웅은 어떻게 역사에 남는가. '영웅'의 사전적 의미는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건 '용맹'과 '보통 사람'이라는 부분이다. 지혜와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용맹함이 없으면 영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용맹함은 용감함에 더해진 사나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어지러운 세상이 영웅을 필요로 한다는 이 말은 불의와 폭정에 대항하는 마음의 격렬한 움직임을 가진 이가 나타나야 세상을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온순함이 고분고분함이 되고 부드러움이 흐릿함이 될 수도 있을 세상에 용감하고 사나운 이들의 이야기가 도착했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이다.
모두가 아는 영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안중근이고 그가 한 행적은 세대를 뛰어 넘어 깊은 감동을 주는 신념과 용기의 발자취에 다름 아니다. 역사 속 인물 특히 영웅이라 칭할 만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시 극화된 채로 만날 때 우리는 영웅 서사의 축과 흐름을 어느 정도는 짐작한다.
그런데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우리 역사 속의 영웅 안중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의 제목이 '안중근'이 아닌 '하얼빈'이라는 것은 이 영화가 영웅의 개인 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가 아닌 그가 머물렀던 곳의 이야기이자 그의 움직임을 엄호한 그곳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하얼빈은 영웅으로 기록되는 개인 안중근이 탄생하는 신화적 공간이 아니라 한 인간을 겹겹으로 엄호한 믿음의 풍경이 기억된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인물화라기 보다는 풍경화에 가깝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하얼빈'의 여러 가지 기술적 요소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단연 촬영일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머문 세상을 담아내는 동시에 시대 속에 담긴 인물들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 가능한 느리게 움직인다. 이를테면 '하얼빈'은 암적응의 영화다. 빛이 어디에 있는지 그 빛이 우리를 향해 비춰줄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대로 관객들을 다시 데려다 놓는 것이다.
어둠에 눈 뜰 때, 명확한 식별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실은 홀로가 아닐지라도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놓인 고립의 상태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럴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어둠 속에서도 눈을 떴던 그 순간의 힘을 믿는 것뿐이다. 이 어둠 속에서도 눈을 뜬 이가 나뿐만이 아님을 믿어보는 것이다.
'하얼빈'은 그 동토에서 그렇게 눈을 떴던 이들이 기어코 확보한 시야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나의 새해 첫 영화였다. 극장 문을 나와서 핸드폰을 켜자 잠시 멈춰 있던 뉴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전히 어두운, 캄캄하기만 한 뉴스들 위로 어떤 빛들이 반짝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충분히 어두웠기에 눈을 뜬 이들이 세상 속에서 함께 하자며 빛을 흔들고 있었다. 나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영웅들의 부름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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