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곳에 큰물은 있었을까?
[한라일보] 대물동산은 대려물동산 또는 대려물오름이라고도 한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있다. 뚜렷한 분화구가 있는 화산체라기보다는 침식되고 남은 낮은 지형에 가깝다.
지역에서는 대려수악(大呂水岳)으로 쓴 사례가 채록되어 있다. 한자의 뜻대로 읽으면 '큰 대(大)·음률 려(呂)·물 수(水)·큰 산 악(岳)'이다. 그러나 이 표기가 뜻을 나타낸 것인지, 소리를 빌려 쓴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늘날의 '대물동산'은 '대려물동산'에서 가운데 음절이 약해져 빠진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자표기는 소리를 옮겨 적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물동산'이라는 소리에 이끌려 이를 '대+물'의 구조로 보고 설명해 왔다. 2006년에 나온 '북제주군 지명총람(하)'은 '대물동산'을 '대물'이 있는 동산에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또 이 '대물'은 예전에 있던 큰물인데, 2~3년 전에 매립되어 지금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대물동산, 사면이 완만하고 위는 평평하다. 서쪽에서 촬영. 김찬수
그러나 '대물동산'은 '대려+물+동산'에서 줄어든 이름으로 보인다. 이렇게 줄어든 이름을 다시 '큰물이 있었던 동산'이라는 뜻으로 풀이한 셈이다. '대'라는 음에는 이미 '대려'가 줄어든 흔적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이 이름의 뜻을 알려면 먼저 '대려'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야 한다.
제주도 지하수정보관리시스템에는 송당리의 용천수로 올로래기물·거슨새미·돌오름물 등이 올라 있고, 밧돌오름샘물도 따로 확인된다. 하지만 대물동산·대려물동산·대려물오름에 딸린 샘은 확인되지 않는다. '북제주군 지명총람(하)'은 대물이 2~3년 전에 메워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보다 앞선 지형도에서 그 물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 볼 수 있는 축소 이미지와 목록 정보만으로는 대물동산 부근의 우물이나 못 기호를 뚜렷하게 읽기 어렵다. 다른 여러 정황까지 함께 살펴보아도 '대물동산'의 '대물'을 큰물로 볼만한 역사·민속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려물'의 원뜻은 '조선지지자료', 일제강점기 지형도와 지적원도, 송당리의 현지 발음을 서로 대조한 뒤 판단해야 한다.
‘대려물’, 넓적한 평원의 고대어
송당리에 샘과 용천수가 실제로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대물동산의 '물'과 직접 이어진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채록된 표기 '대려수악(大呂水岳)'의 '수(水)'만 보고 '샘이 있는 오름'이라고 풀이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약하다. 특히 '수(水)'는 토박이 이름의 마지막 음절 '물'을 한자로 옮긴 음차자일 수도 있다. 또는 '대물' 자체가 실제 물과 관계없는 하나의 고유지명일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

다려도, 조천읍 북촌리 앞바다에 있다. 남서쪽 서우봉에서 촬영. 김찬수
더구나 대물동산은 자체 높이가 17m밖에 되지 않는 매우 낮은 구릉이다. 제주에서 '물'은 땅에서 솟는 샘만 뜻하지 않는다. 빗물이 고이는 못·물통·습지·움푹한 저지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송당리에는 집중호우 때 물이 고이는 속칭 '큰물'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곳은 대물동산과 거리가 멀다.
지형을 살펴보면 대물동산은 능선이 평평하여 'ᄆᆞ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자체 높이도 낮지만 사면까지 완만하여 정상 가까이까지 밭으로 이용한다. 정상 역시 넓고 평평하다. 따라서 대려물의 '물'은 물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ᄆᆞ르'가 줄어든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제주 지명에는 이처럼 평평한 땅을 'ᄃᆞᆯ'로 나타낸 곳이 꽤 많다. 앞에서 여러 차례 살펴본 것처럼 'ᄃᆞᆯ'은 돌오름의 '돌', 도레오름의 '도레', 다래오름의 '다래', ᄃᆞ라미의 'ᄃᆞ라'와 뿌리가 같다. 'ᄃᆞᆯ'은 평평한 지형을 가리키는 몽골어계 고어다. 능선이 평평하다는 뜻이 아니라 지면이 넓적하고 평평하다는 뜻에 가깝다. 몽골문어·칼카어·칼미크어에도 매우 비슷한 발음이 나타난다. 투르크어에서는 '뒤~뒷'으로 나타난다. 'ᄃᆞᆯ'과 '뒤'는 소리는 다르지만 뜻은 같다. 대물동산의 원래 이름을 '대려물동산'으로 본다면, 이 이름도 'ᄃᆞᆯ'계 지명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도 위가 평평한 지형이다.
수달도 물개도 닮지 않은 다려도
조천읍 북촌리 앞바다에는 다려도가 있다. 기록에는 다려도, 다래여(多來礖), 달서도(獺嶼島), 달여도 등으로 나타난다. '여'는 제주 해안 지명에서 흔히 쓰는 말로, 바닷물 위로 드러나거나 밀물 때 잠기는 암초와 바위섬을 뜻한다. 따라서 다래여는 본래 '다래라고 부르는 여', 곧 다래라는 이름을 가진 암초나 바위섬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현재 널리 쓰이는 한자 표기는 달서도(獺嶼島)다. '북제주군의 지명총람'을 비롯한 여러 제주 지역 소개 자료에는 "섬 모양이 물개를 닮아 달여도 또는 달서도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되풀이된다. 그러나 달(獺)은 본래 '수달 달'이지 물개를 뜻하는 글자가 아니다. '달서도(獺嶼島)'를 글자 그대로 읽으면 '수달이 있는 바위섬'에 가깝다. 또 섬이 물개를 닮았다는 판단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전형적인 형상유추이다. '물개를 닮아 생긴 이름'임을 보여 주는 오래된 기록도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 이름인 '다래여·달여'의 소리에 맞추어 '달(獺)'자를 붙이고, 뒤에 '물개 형상' 이야기가 더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달서도(獺嶼島)'는 '서(嶼)'와 '도(島)'가 모두 섬을 뜻해 의미가 겹친다. 이는 토박이 지명에 한자를 거듭 덧붙이는 과정에서 생긴 후대 표기일 가능성을 높인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다려도는 섬의 생김새나 배열을 나타낸 토박이말이거나, 지금은 뜻을 잃은 제주어 또는 고대 지명어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원래 이름은 'ᄃᆞᆯ여' 또는 'ᄃᆞᆯ섬'일 수 있다. 소리가 이어지면 'ᄃᆞ려여' 또는 'ᄃᆞ려섬'이 된다. 이런 점에서 다려도도 대려물동산과 같은 'ᄃᆞᆯ'계 지명어일 가능성이 있다. 대려물동산은 위가 평평한 모루이고, 다려도는 위가 평평한 섬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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