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는 그 뜻이 궁금하다
[한라일보] 지명의 뜻이 너무 막연하다. 아무도 해명하지 못한다. 생기리오름은 남원읍 신례리에 있는 오름으로, 표고는 260m, 자체 높이는 65m다. 평평한 등성마루가 길게 뻗은 모양이다.

생기리오름을 북동쪽에서 찍은 모습. 마루오름의 형태가 뚜렷하다. 김찬수
남서쪽으로 벌어진 말굽형을 이루고 있다. 동쪽 사면의 기슭은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는데, 여느 한라산 남사면 계곡에서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위미리 일대에 걸쳐 있는 하천이다.
1997년 제주도가 발간한 '제주의 오름'은 이 오름의 대표 지명을 생기악으로 표기했다. 그러면서 다른 이름으로 생기오름, 생길이오름, 생기악(生氣岳), 생길악(生吉岳), 성길악(成吉岳)을 제시했다. 이 지명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어원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내용은 1995년 김종철의 '오름나그네'에도 똑같이 나온다.
오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09년 '탐라지도'의 성길악(成吉岳)으로 보인다. 이후 19세기말 성길봉(成吉峯), 20세기 중반 생길악(生吉岳), 생길악·생기악(生氣岳)으로 표기했다. 지역에서도 이처럼 쓴다. 발음할 때는 생기리오름이라 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지명이 원래 '성기리오롬'이었다고 추정한 사례가 있다.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생기리오롬이라 하는데 비해 옛 기록에는 성길악(成吉岳), 성길봉(成吉峯)으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성기리'가 '생기리'보다 앞선 음성형으로 나타나고 '생기리'는 '성기리'의 변음이라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문제는 '생기리'든 '성기리'든 그 뜻은 모르겠다는 점이다. 독자는 그 뜻이 궁금하다.
성길악 지명에 가려진 뜻
생기리오름의 뜻을 해명하기 위해 이 오름의 또 다른 지명이자 최초의 표기인 성길악(成吉岳)에서 출발해 보자. 이 말은 짐작건대 '성길이'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당시 '성기리'라고 했든 '성기리오름'이라고 했든 한자로 표기하는 입장에서는 이와 같이 성길악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서쪽에서 찍은 모습. 등성마루가 완만하다. 김찬수
그렇다면 지역에서 왜 '성기리'라고 했을까? 오름 이름 가운데 '성'이라는 음절이 나타나는 사례로 '성진이오름'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성진이오름'은 본 기획에서 다룬 바 있다.
좌보미오름, 한자두(수월봉), 모지오름, 남조순오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름 지명에서 '마루'를 산등성이의 의미로 쓰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할 때 '마루 지(旨)'를 차용한다. 좌보미오름에서는 '좌', 한자두에서는 '자', 모지오름에서는 '지'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법정악, 망젱이, 젯그린동산에서 보듯이 '마루 지(旨)'는 '자'로 발음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데 '자'와 '자'는 거의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 문제는 이 '자' 혹은 '자'가 중세 국어에서 '성(城)'의 뜻으로 쓰인 고유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제주어에서는 지금도 성을 '잣'이라고 한다. 중잣성, 하잣성이라는 말은 중성성(中城城), 하성성(下城城)을 말한다. 같은 뜻이 중첩된 지명이다.
이처럼 실제로는 '마루'를 지시하려고 '자' 혹은 '지'라고 발음한 것을 '성(城)'으로 차자하게 된다. 똑같은 방식으로 '성길악'의 '성'은 이렇게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명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잊히고 '성'이라는 발음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니 받아 적는 사람도 어떤 글자를 선택할지 망설였겠지만 결국 비교적 사용 빈도가 높은 '성(成)'을 선택했을 것이다.
'성길악'의 '길'은 어디서 왔을까? 삼형제오름에서 그 힌트가 있다. 이 오름은 1100도로의 1100고지에 인접해 있다. 1997년 제주도에서 발간한 '제주의 오름'에는 1100도로 탐라각휴게소에서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3개의 오름을 삼형제오름(세오름)이라 하며, 차례대로 큰오름·샛오름·말젯오름이라 따로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오름들은 줄지어 서 있으며, 세 오름의 정상부는 다소 평평하다고 했다. 흔히 '마르'라고 부르는 지형이다.
역사적으로 '삼장동(三長洞)', '삼장산(三長山)', '삼장악(三長岳)' 등으로 나타난다. 본 기획의 삼형제오름 편을 참조할 수 있다. 전부 요소는 모두 삼장(三長)이다. '삼장(三長)'의 '장(長)'은 '길 장'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긴'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 아니라 '세자이'→'세잔이'→'세진이' 과정으로 나타난 세진이의 '진'을 '긴'으로 인식하고 쓴 훈독자이거나 '자' 혹은 '잔'의 뜻과는 무관하게 '진'을 나타내기 위해 훈가자로 쓴 것이다. 나란히 놓인 세 개의 '마르'라는 뜻으로 쓴 것이 '삼장악'이다.
성기리에서 생기리로
'성길악(成吉岳)' 혹은 '성기리오름'의 '길(吉)' 혹은 '기리'는 마루를 나타내려 한 '자' 혹은 '잔'의 변음 '진'을 '긴'으로 인식하고 음가자로 차용한 것이다.

정상에서 남서쪽을 향해 찍은 모습. 분화구로 추정되는 지형이 보인다. 김찬수
즉 '길할 길'이라는 뜻과는 상관없이 그저 '길'이라는 발음만 끌어다 쓴 것이다.
그렇다면 '생기악' 혹은 '생기리오름'의 '생'은 어디서 왔나? '성(成 혹은 城)'의 중세 발음은 '셩'이다. 1632년 '가례언해'에 "권당이며 손이 셩 밧 길 가의 幄(악)랄 設(설)하야(친척과 손님이 성 밖 길가에 장막을 설치하여)"라고 나오는 등 수많은 고전에서 확인된다. '생(生)'의 중세 발음은 '쇵'이다.
1637년 '관념요록'에 "쇵와 로와 병와 덛덛흠 업슨 곧을 몯 면하니(태어나고 늙고 병들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일을 피하지 못하니)"라고 나오는 등 역시 여러 고전에서 확인된다. '셩'과 '쇵'은 현실음으로는 발음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정확히 구분해서 사용하기도 어렵거니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셩'→'쇵'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 '성기리오름' 혹은 '생기리오름'은 '마루오름, 즉 정상부가 평평한 오름'이란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기사제보▷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