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사는 법](16) '헤겔좌파' 자처 오승태 할아버지

[이 사람이 사는 법](16) '헤겔좌파' 자처 오승태 할아버지
'경계인'으로 살아온 굴곡 많은 생애
  • 입력 : 2009. 04.25(토) 00:00
  • 표성준 기자 sjpyo@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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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좌파'를 자처하는 오승태 할아버지는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신의 사상을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김명선기자

조총련학교 교사 퇴직 후 고향 제주 정착
칠순 넘어서도 정보기관 제집 드나들 듯
90 바라보는 나이에 삶·사상 정리 준비중


'이지메'를 견디지 못해 결석하는 일이 잦아졌다. 학교에 간다고 거짓말해 몸을 숨긴 창고에서 접한 대중잡지 '킹구(キング·King)'는 식민지 안에 머물던 어린 오승태의 의식과 사유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일본의 과학문명을 짊어지고 갈 천재 학자라면서 조선인 기사가 실렸더라고. 맨날 왜놈한테 핍박받는 게 내 운명인 줄 알았는데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1924년 성산읍 난산리에서 태어난 오승태 할아버지는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일본 고베로 건너갔다. 돈을 벌려면 부끄러움을 잊어야 한다던 어머니는 넝마주이가 됐다. 넝마주이 열다섯 가구가 모여 살던 판잣집들 사이엔 주워온 쓰레기를 모아두는 창고가 있었다. 냄새난다는 이유로 일본 아이들의 '이지메'에 시달려 야간학교로 옮겼지만 일본인 교사는 조선인 학생을 거지 다루듯 했다. 학교가 아닌 헌 책과 신문이 가득한 창고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계기다.

일본 생활 2년째 홀로 귀국한 이후 성산공립보통학교(현 동남초등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동창들은 서울로 진학했지만 부친은 병사하고, 남의 땅을 부쳐먹던 조부모는 뒤를 봐줄 형편이 아니었다. "열다섯에 가출해 서울에 살면서 와세다대학에서 발행한 중학교 강의록을 구해 하숙집에 틀어박혀 전검(전문학교 입학시험 자격)을 준비했는데 전쟁말기 패색이 짙은 일제가 시험을 시행할 리가 없었지요." 불행 중 다행인지 징병된 일본인 교사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실시한 교원시험에 합격했다.

귀향한 그는 한림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해방 후 서북청년단의 횡포에 못이겨 일본으로 밀항했다. "전후 일본에서는 좌익계열 재일동포 자금으로 소학교와 중고등학교가 곳곳에 지어졌어요. 하지만 현대 교육을 받고 한국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소학교 교장 자리를 맡게 됐어요." 재일동포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김석범·김시종 등과 함께 역사와 국어를 가르쳤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학생들 앞에서 저항시인 이육사의 청포도를 일본어로 번역한 걸 낭송했어요. 학생들이 이육사 시를 처음 접했을 때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어요."

가슴 속에 고향을 품고 살던 그에게 희소식이 들려왔다. 1975년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사업이 시작된 것. 1978년 역마살을 끝냈다. 하지만 문민의 정부 출범 직전까지 칠순이 넘어서도 수시로 정보기관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밤새도록 잠을 안재우고, 유도복을 입으라고 강요하기도 했어요. '이 늙은이를 메다치겠다는 것이요?'했더니 실실 웃으면서 어떻게 알았냐고 하데요. 집사람은 그놈들과 대놓고 싸우기도 했어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그는 경계인이었다.

지난해 11월 아내를 여의고 다시 혼자가 된 이후엔 눈이 멀고 기운도 쇠해지고 있다. "이젠 신문도 2중 돋보기를 껴야 겨우 볼 수 있어요. 제사 땐 절하고 일어서다 무릎이 아파 넘어질 뻔 했다니까." 만혼 부부였던 그는 후손을 갖지 못한데다 외아들이어서 직접 조부모와 부모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삶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것일까. 자신의 사상을 글로 정리하고 싶어 한다. "한국사회는 엉터리가 너무 많아.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을 구분하려면 눈을 보면 돼요. 한국사람은 앉기만 하면 술을 마시거든."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여전히 '헤겔 좌파'를 자처하는 그가 후세대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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