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3)너븐숭이 애기똥풀-정군칠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3)너븐숭이 애기똥풀-정군칠
  • 입력 : 2023. 04.04(화) 00:00  수정 : 2023. 05. 30(화) 10:36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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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븐숭이 애기똥풀 - 정군칠




소나무는 제 그늘에

남의 식솔 두지 않는다, 하지요

그런데 웬일인가요

너븐숭이 애기무덤 가 솔가지들은

애기똥풀 노란 꽃들을

품 안에 들이네요

육십갑자 전의 일 엊그제인 양

사월 어느 하루 날을 잡아

송홧가루 날리네요

아가들의 혼백 위로

눈물 같은 비를 섞어 초유를 흘리네요

구멍 숭숭 돌담에

애기똥풀 노란 꽃 피어나네요



애면글면 멀대같던 소나무

예순 해 넘게 해 온 일이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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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은 늦지만, 우리말의 정서적 역량을 제대로 갖춘 정군칠 시인은 한 삶 속에서 다른 삶을 만들어내는 일에까지 시를 밀어 갔다. '너븐숭이 애기똥풀'은 상처받은 인간의 세계를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에 겹쳐놓으면서 표면 위로 올라오려는 에너지를 능숙히 단속하는 언술을 보여준다. 내포를 늘리고 솟구치려는 날것을 어루만져 누르는 언어의 물질감과 존재감은 그의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 흐름과 서사, 파토스로 읽히는 시간의 물결을 타고 '애기똥풀'은 오늘 노랗게 수면에 떠올라 60년 전의 죽음에 관통된 삶을 오늘에 되새김하는 시인의 삶은 기억해야 할 기억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가 빌리고 있는 풍경은 소나무와 애기똥풀이 있는 너븐숭이지만, 4·3의 세월은 먼 데서 언제나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밀려와 있다는 뜻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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