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⑤생물도의 화전 생활

[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⑤생물도의 화전 생활
마을 정착·연작 가능한 토지로… 화전도 진화한다
  • 입력 : 2023. 09.07(목) 00:00  수정 : 2023. 09. 07(목) 20:17
  • 이윤형·백금탁 기자 yhlee@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19C 말 전후해서 마을 형성 시작
100년 넘어도 거의 원상 그대로
화전 문화 보여주는 종합세트장

1910년대 화전 매매문서 첫 확인
개인 간 거래 소유권 변동 주목


[한라일보] 서귀포시 서홍동의 생물도 화전 마을은 잊혀진 마을이자, 잃어버린 마을이다. 취재팀은 수차례 조사를 통해 집터, 올레, 통시, 계단식 밭 등을 확인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다양한 석축 구조물과 방앳돌 등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생물도 마을은 화전 경작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19세기 말을 전후해서 뿌리 내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서 화전은 1894년 공마제(貢馬制)가 폐지되고, 그 대신 1897년부터 금납제가 시행되면서 합법화됐다. 생물도 마을은 제주4·3사건으로 사람들이 정든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존속되고 있었다. 이후에는 영영 복구가 되지 않은 채 잊혀져갔다. 생물도 마을에는 집터, 쇠막터, 울담, 밭담, 계단식 밭, 먼 올레, 올렛담, 생활용수 등으로 이용했던 봉천수 흔적 등이 남아있다. 아직까지 제주의 화전 마을 가운데 이곳보다 다양하게, 또 원상을 거의 간직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양호하게 남아있는 생물도 집터 내부를 취재팀이 조사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집터 기단부만 남아있는 또 다른 집터. 특별취재팀

이 뿐이 아니다. 화전을 하던 경작지도 매매가 이뤄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제주에서의 화전은 산간지대나 중산간 지대에서 주로 이뤄졌다. 토질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화전이 매매를 통해 거래됐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취재팀은 무주공산으로 여겨졌던 화전도 매매가 이뤄진 사실을 보여주는 문서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진관훈 박사(경제학)가 취재팀에 제공한 화전 '토지매매계약서' 작성 날짜는 1911년 음력 10월 14일이다. 이 시기는 화전이 정부에 의해 합법화된 후 10여 년이 흐른 시점이다. 토지매매 대상은 '화전(火田)'으로 적혀있다. 매도인은 전라남도 정의군 우면 동홍리 오유방, 매수인은 동홍리 화전동 김치보 사이의 토지매매에 관한 내용이다. 토지매매 보증인은 서홍리 변의성이었다. 매매 면적은 모종(보리 씨) 4두락(斗落) 즉 4마지기로, 약 600평(당시 1마지기는 밭 150평) 정도이다. 대매 대금은 20엔이었으며, 수료금은 50전이었다.

화전 거래가 이뤄진 내용이 담긴 1910년대 토지매매문서. 특별취재팀

무성한 대나무 숲에서 확인된 석축시설물. 특별취재팀

진관훈 박사에 따르면 "1915년 대맥 수확량은 300평당 1.6석이었으며 대맥 1석 4엔 80전이었다. 당시 석공 임금이 3엔 80전에서 2엔 70전으로, 잡부는 1일 1엔 정도를 받았다. 당시 600평에서 대맥 4.2석 정도가 생산되었고, 대맥 1석 가격이 4엔 80전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4.2×4엔 80전=20엔 16전으로 계산하면, 일 년 내 밭 매매원금을 거둬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당시 화전토지 가격은 농업생산력이나 인건비에 비해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고 했다.

화전 토지가 매매가 이뤄졌다는 것은 개척 당시 생산성이 낮은 토지에서 어느 정도 옥토로 점차 바뀌었음을 뜻한다. 보통 화전은 초기 개간 당시 3년 윤작(輪作) 또는 지역에 따라 10년 윤작도 행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토지가 항시 연작이 가능한 토지인 숙전으로 바뀌면서 화전도 매매가 가능할 정도로 가치를 지니게 됐다는 의미다. 이는 토지 생산성도 그만큼 늘어났음을 방증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생활유산이 바로 생물도에서 확인되는 통시와 방앳돌이다.

제주도의 화산회토는 질소, 칼륨 인이 부족하다. 제주 농가에서는 이를 가축의 배설물에서 얻어지는 퇴비로 보충했다. '돗통시'에서는 '돗거름' 즉, 퇴비를 생산한다. 그 퇴비는 보리를 경작할 수 있게 양분을 제공한다. 생물도에서는 돗통시에서 나오는 돗거름으로 땅을 지속적으로 비옥시켰고, 그만큼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방앳돌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지 내부에서 확인된 기둥 구멍. 특별취재팀

생물도에서 발견된 방앳돌. 특별취재팀

진관훈 박사는 통시에서 생산된 돗거름의 사용 확대는 곧 농업생산량 증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말방애의 존재가 이를 말해준다.

제주지역에서는 10~20가구당 말방애 하나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생물도와 가까운 연자골에도 말방애가 있었다. 그런데 3~4가구 정도로 단촐했던 생물도 마을에도 말방애가 별도로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통시에서 생산된 돗거름의 시비확대로 인한 농업 생산량 증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돗거름 시비확대-목장 밭의 지력 상승-농업생산량 증가와 숙전화가 진행되면서 당초 유목형이었던 화전 토지도 매매하게 된다. 생물도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흔적들은 사람들이 터를 잡고, 개척 단계의 하등 토지에서 돗거름을 통해 비옥시켜서 숙전, 즉 연작화가 가능하게 되는 화전의 진화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생물도 마을의 화전이 합법화되기 시작하는 19세기 말을 전후해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생물도를 중심으로 연자골, 추억의 숲길, 한라산 둘레길을 연결하는 공간은 제주 화전의 원초적 생활상과 목축문화를 보여주는 종합세트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전이 제주인의 삶과 역사 속에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당국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제2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5598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