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54)란아, 내 고양이였던*-황인숙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54)란아, 내 고양이였던*-황인숙
  • 입력 : 2024. 02.13(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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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아, 내 고양이였던* - 황인숙




그건 동트기 전이었지

우연히 나는 보았지

두 집 지붕 너머 긴 담장 위로

고단한 밤처럼 네가 걷는 것을

그 담장에는 접근 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지

너는 잠깐 멈춰

내 쪽을 흘깃 보았지

잠깐 비칠거리는 듯도 보였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오, 그러나 기하학을 구현하는 내 고양이의 몸이여

마저 사뿐히 직선을 긋고

담장이 꺾이는 곳에서

너는 순식간 소실됐지

그 순간 사방에서 매미들이 울어댔지

그 순간 날이 훤해졌지

그 순간 눈물이 솟구쳤지

너는 넘어가버렸지

나를 초대할 수 없는 곳

머나먼 거기서 너는 오는 거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나는 너무도 고적했지.

*「란아, 내 고양이였던」 부분

삽화=써머



셋집 옥상 위를 서성이거나 잠 못 드는 침상에서 뒤척이는 화자의 시간과 겹쳐 지면서 고양이는 미명의 담장 위로 나타나고 담장 위에서 그만 사라진다. 미끄러지는 조약돌처럼. 어떤 생에만 들르는 약속 없는 방문자로 고양이의 '소실'은 고적을 부르지만, 고양이의 소실 이전부터 화자는 너무 고적했다. 비틀림 없이 고양이를 있는 그대로 그냥 보는 생각은 논리를 사용하지 않고(없는 게 아니라), 투명한 무늬로 경미하고, 그리고 그것이 시인 자신을 보는 검소한 방식이기도 하고. 조신하게 담장 위를 걷다 훌쩍 넘어가 버린 빛 한 점으로 찌르르한 느낌. 그 눈빛 잠깐, 흘깃 본 한 마리 고양이를 온전히 이해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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