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아! 귤림서원이여…

[문영택의 한라칼럼] 아! 귤림서원이여…
  • 입력 : 2025. 01.21(화) 05: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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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2019년 유네스코는 조선 최초로 세워진 소수서원 등 9개의 서원을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하면서 "서원은 성리학이 한국 여건에 맞게 변화한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지금의 공사립 중등학교 격인 서원을 세우려면 사재(祠齋) 즉 사당과 재실(공부방)을 갖춰야 했다. 제주에서는 기묘사화로 사사된 충암 김정을 모신 사당인 '충암묘'를 1578년 조인후 판관이 가락천 동쪽에 세우더니, 1659년 명도암 김진용의 건의로 제주목사 이괴가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 고득종의 집터에 유생의 공부방인 장수당을 짓고, 충암묘를 장수당 곁으로 옮겼다. 1682년 숙종임금이 예조정랑 안건지를 보내 사액(賜額)을 내리니, 제주 최초의 사액서원인 귤림서원이 개교했다. 이후 귤림서원 사당에 목사 송인수, 어사 김상헌, 유배객 정온·송시열 등 오현을 모시나, 1871년 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은 폐교된다. 1892년 해은 김희정 등이 귤림서원 자리에 5현을 기리는 조두석 5기와 제단 등을 세우니, 이곳이 1971년 지방문화재 1호로 지정된 오현단이다.

1907년 제주군수 윤원구 등이 사립의신학교(제주일중·제주고의 전신)를 세우고, 1940년 학교가 서사라 등지로 옮겨가 비워있던 터에서 해방 후 개교한 오현중·고가 1972년 화북으로 옮겨간 후 이곳은 민간에게 매각되니, 제주교육의 요람인 귤림서원은 오늘날처럼 쪼그라들고 말았다.

2004년 이후 당국에서는 오현단 경내에 고득종·김진용 향현들을 모신 향현사와 사재를 복원하면서 재실에는 장수당이란 편액을 적절하게 게시하나. 사당에는 '귤림서원'이라는 편액을 엉뚱하게 달았다. 이는 서원의 역사와 가치를 외면하거나 무시한 처사이다. 귤림서원은 사당이 아닌 서원의 이름이기에, 귤림서원 편액은 사당이 아닌 서원 입구에 달아야 한다. 그럼 사당의 이름은?

1577년 조선의 문장가 백호 임제는 부친인 임진 목사를 뵈러 제주에 왔다가, 마침 이곳을 둘러보곤 충암묘기를 지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판관(조인후)의 뜻이 아름답고 훌륭하기에, 이제 그분의 요청으로 기문을 짓고 제사를 올린다." 1771년 대정현에 유배됐던 권진응은 이곳을 찾아와 지은 귤림서원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유배가 풀린 나는 (오현의) 유적들을 찾았다. 우암 선생의 유배지에 비석을 세우고, 판서정에서는 충암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나머지 세 사람의 유적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귤림사(橘林祠)'에 절을 하고 물러 나와 여러 유생들에게 …."

귤림서원 원장을 역임한 필자는 오현단 주변을 오가는 이들로부터 귤림서원 사당 등에 잘못된 편액이 달려 있다는 지적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이에 당국에서 귤림서원 입구와 사당 등에 제대로 된 편액과 정보를 안내하고 제주의 정체성을 바르게 알리는 데도 적극 나서기를 기대해 본다. <문영택 귤림서원 전 원장·질래토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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