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미지의 세계
  • 입력 : 2025. 02.24(월) 02: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피카소의 비밀'.

[한라일보] 2025년도의 미술관에서 1956년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20205년 MMCA 필름앤비디오의 첫 번째 프로그램 <창작의 순간-예술가의 작업실>프로그램 덕이었다. 타이틀에 걸맞게 미술, 건축,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창작자들의 작업을 담고 있는 8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일 파블로 피카소를 다룬 영화 '피카소의 비밀'을 관람했다. 넓고 쾌적한 국립현대미술관은 겨울의 주말을 맞아 따뜻한 실내에서 다채로운 예술의 조각들을 만나러 온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도서관의 고요한 열기와는 또 다른 미술관의 차분한 활기는 공간이 주는 환대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게 했다. 순간을 가둔 작품들 앞에서 시간을 멈춘 채 각자와 함께의 동선으로 유영하는 관객들의 흐름을 타고 나 또한 오랜만에 느낀 낯선 활기로 기꺼이 일렁였다.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관람한 '피카소의 비밀'은 예측과는 사뭇 다른 영화였다. 몇 해 전 피크닉에서 관람했던 포토그래퍼 사울레이터의 영화 '사울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처럼 예술가의 사적인 순간들이 담겨 있지 않을까 막연히 추측했던 것과는 다르게 '피카소의 비밀'을 정말이지 위대한 예술가 '피카소의 작업 비밀'을 탐색하는 실험 영화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영화의 서두, 감독은 내레이션으로 앞으로 펼쳐질 작품에 대한 흥미로운 호기심과 예술에 대한 화두를 동시에 담은 질문을 던진다. '랭보가 시를 쓰고 모차르트가 작곡하는 과정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피카소가 보여줄 것이다.' 70대의 피카소는 맨몸에 반바지만 입은 채로 캔버스 앞 의자에 앉는다.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카소 특유의 자유로운 드로잉이 시작된다. 스크린 가득 흰 어둠이 펼쳐지고 프레임의 어딘가로부터 검은 선들이 빛처럼 나타난다. 그가 무엇을 그릴지, 과연 어떤 형상과 이야기가 화폭/스크린을 채우게 될지 알 수 없기에 흥미진진하다. 컴퓨터그래픽이라는 마법이 없던 시절, 카메라는 캔버스 뒷 편에서 거울처럼 비춰지는 드로잉의 흔적들을 담아낸다.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누군지는 분명하지만 그의 몸을 볼 수 없기에 이 드로잉의 흐름은 오히려 더 선명한 마법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리드미컬한 라인 드로잉에 맞춰 적절한 음악을 채워 넣으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동시에 진동하게 만든다. 러닝 타임 내내 약 20여장의 그림을 보여주는데 초반 모노톤의 라인 드로잉이 진행될 때는 그에 맞춘 간결한 음악이 합을 맞추고 작품의 후반부, 라인 드로잉에 컬러가 더해지며 대작이 아닐 리 없는 작품을 그려 나갈 때는 격정적인 악기들의 협연이 그림과 한 배를 타는 식이다. 으레 예술가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이 취하는 구성인 인터뷰 삽입이나, 자료 화면의 보충 같은 보조적 장치가 '피카소의 비밀'에는 아예 없다. 그저 그림을 그려 나가는 과정에서 화가 피카소가 어떻게 시작하고 언제 멈추는 지를 정직하게 따라갈 뿐이다.

'피카소의 비밀'은 끊임없이 다른 그림을 화면을 통해 펼쳐내는 단조로운 구성을 취하지만 클라이맥스는 분명히 존재한다. 후반부 등장하는 해변 풍경을 그리는 시퀀스가 그 절정이다. 그야말로 슥슥 자신만의 개성과 믿기지 않는 완성도를 보여주던 피카소가 천변만화의 함정에 빠지는 위기 상황이 등장한다. 관객이 보기에 근사하게 완성되어 가던 그림은 어느 순간부터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한다. 유화와 콜라주 기법을 활용한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매끄러운 드라이브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돌연 역주행을 하기도 한다. 객석에서는 안타까운 탄성도 허탈한 웃음도 새어 나왔다. 세계적인 화가 역시 자신의 창작 과정에서 완전한 확신이나 완벽한 결말에 금새 이르지 못한다는 인간미가 주는 재미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지난한 동시에 그래서 지루하지 않은 과정은 모든 창작자들이 겪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수백 번의 퇴고를 하는 작가들도, 몇 년의 시간을 걸려 편집을 하는 영상물의 감독들도 경로의 끝에 순식간에 도달하는 고속도로가 없음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예기치 않은 영감을 주는 국도변의 풍경에 마음을 뺏긴 경험 또한 모두에게 드물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의 결과물들은 샐 수 없이 많다. 누군가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이전의 것들에 빚진 복제품에 불과하다고, 사실은 모든 크리에이터는 스타일리스트에 다름 아니냐며 자조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이 창작의 순간에 겪는 고통과 희열이 비슷할 지언정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세계에 다른 이가 문을 열고 들어올 수는 있다. '피카소의 비밀'을 연출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역시 피카소의 비밀을 완전히 밝혀내지는 못했다. 피카소의 비밀은 여전히, 오로지 피카소의 안에 존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피카소의 비밀'을 연출한 앙리 조르주 클루조 역시 이 작품만으로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온전히 채웠다는 것에 있다. 이 작품을 만들던 그의 희열과 고통은 작품 속에 존재하는 피카소의 그것과는 또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의 여정이 끝날 때쯤 그의 안에 쌓여온 모든 것이 개화하고 발화되며 발색되는 마법의 타이밍을 창작의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707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