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희생자 유가족 임충구씨가 4.3으로 잃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한라일보] 제주4·3의 광풍에 휩쓸리면서 한 순간에 부모를 잃었던 희생자 유가족들이 그 간의 힘겨웠던 세월을 구술로 증언했다.
제주4·3연구소는 28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그리움에 보내는 여든 살 아이들의 편지'를 주제로 스물 네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을 개최했다.
이날 증언본풀이 마당에는 연좌제로 평생을 시달렸지만 꿋꿋하게 버텨 부모님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한 임충구(1944년생)씨와 4·3으로아버지를 잃은 강은영(1942년생)씨가 그 시절의 기억과 아픔을 증언했다.
임충구 씨의 아버지 임원전 씨는 4·3사건 발발 초기에 산에 올라 행방불명됐다. "어멍 말 잘 듣고 누이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냄시라"라는 말을 전하며 집을 나섰던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 곁을 떠났고, 가족들은 후에 4·3진상보고서를 통해 아버지가 제주공항에서 돌아셨다는 것을 알았다.
6살의 어린 임 씨를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어머니도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으로 경찰에 끌려가 희생됐다.
'폭도 아들, 빨갱이 아들'이라고 할까봐 아버지 이름도 함부로 밝힐 수 없었다는 임 씨는 연좌제로 인해 공직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고 했다. 임 씨는 "노력 끝에 보통고시라는 지금의 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했지만 끝내 발령이 나지 않았다"면서 "검찰청 서기, 교도소 공안직 시험에 동시 합격한 처남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결혼 직후 곧 발령이 될 거라고 신나서 이야기했는데."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연좌제가 혹시나 아이들의 미래까지 막아버리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며 4·3을 생각하기도 싫었다던 임 씨는 2022년 검찰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4·3수형인 특별재심 신청자에 대해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하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는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의해 아버지를 총살한 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버린 것도 모자라 극우단체의 4·3폄훼 자료를 근거로 사상 재검증을 하겠다는 것은 망인을 두번 죽이고 유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라며 천애고아의 어려웠던 삶, 연좌제로 인한 평생의 고통 등을 장문의 글로 정리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 결과 아버지는 최종 선고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임 씨는 "아버지를 원망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다"라면서 "하지만 4·3특별법이 만들어진 후 진상보고서를 보니 당시 시류에 따라 모두 잘 사는 사회를 만드려고 애쓰다 아버지가 희생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는 원망하지 않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강은영 씨 역시 4·3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당시 서귀면장이었던 부친 강성모 씨는 군인들에게 부당함을 항의했다는 이유로 연행된 뒤 1950년 7월 16일 산지항 앞바다에서 수장됐다.
강 씨는 "제주시 주정공장에 아버지가 수감돼 있는 것을 알고 어머니가 면회를 갔다"면서 "삼일 째 되는 날, 그날도 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 옥문은 이미 열려있었고 아버지 행방은 알 수 없었다"고 전했다. '두 아들의 소식을 물으면서 두 눈에 이슬이 고였다'는 것이 어머니가 강 씨에게 전해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강 씨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어느 봄날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자구리 바닷가로 갔다. 어머니와 나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면서 "어머니는 하얀 광목 적삼을 펴들고 아버지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고 아픈 기억을 말했다. 그는 "그날이 아버지 비석을 세우는 날이었다"며 "아버지 시신이 없어 무덤을 만들지 못한 것이 늘 한이었던 어머니는 흰 적삼을 아버지 비석 아래 묻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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