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1960년대 한국에서 '중산층'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소득을 가리키는 비교적 실용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되고 소비문화가 일상에 스며든 1970~80년대를 지나며 중산층은 '보통 사람'과 '정상 가족'을 부르는 이름으로 확장됐고, 아파트 한 채와 안정적인 월급, 자녀 교육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은 자연스럽게 삶의 기준이 됐다. 이 시기 중산층은 스스로를 사회의 중심이자 민주화의 주체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그러한 한국형 중산층 신화가 가장 선명하게 형성된 시기였다. 3저 호황이 더해진 성장의 분위기 속에서 많은 가정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리도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품었다. 안정은 손에 닿을 듯한 목표로 제시됐지만, 그 안정이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지는 않았다. 소비를 통해 '품위 있는 삶'을 가꾸고 가정을 안온한 공간으로 유지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구조적 불평등과 폭력을 외면하거나 지나쳤다.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넥타이를 맨 중산층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에는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도 노동과 사회적 민주주의의 문제 앞에서는 망설였다는 평가는, 그 시대가 품었던 양가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가 김향숙은 이러한 시대의 중심부를 예민하게 응시해 온 여성 작가로 평가된다. 1989년에 발표된 '종이로 만든 집'은 제목처럼 산업화의 성취 위에 세워진 중산층 가정의 안정이 얼마나 얇은 심리적 토대에 기대고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좋은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로 살아온 영옥의 집은 겉보기에는 단정하고 평온하지만, 딸 우혜가 '괴물'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단단했던 평온은 쉽게 균열된다. '종이로 만든 집'이라는 비유는 안정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에 대한 오랜 상념을 남긴다.
2026년의 새해를 맞은 지금, 세계 경제는 여전히 불안의 국면을 지나고 있다. 전쟁과 기후 재난, 고물가와 고금리는 삶의 조건을 빠르게 바꾸어 놓았고, 중산층을 향한 믿음은 어느샌가 아득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중산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를 거울처럼 돌아보면, 안정을 담보로 선택한 외면과 묵인은 오늘의 풍경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종이로 만든 집'이라는 은유가 오래도록 유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삶이 타인의 불안 위에 놓여 있다면 그 평온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그래서 올해 새해 인사는 조금 조용해도 좋겠다. 옛날식 중산층의 회복을 되풀이하기보다, 월세방이든 대출로 버티는 아파트든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탱해 주는 조건을 떠올려 본다. 누구나 최소한의 존엄과 예측 가능성을 누릴 수 있는 삶. 사라진 듯 보였던 중산층의 자리는 어쩌면 그런 공동의 기준 속에서 다시 채워질지도 모른다. 그 꿈은 오래전 1980년대의 중산층이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꿈이자, 지금 여기에서 다시 천천히 이어가야 할 약속일 것이다.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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