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어머니의 여행 가방에는 아직도 빨간 크리스마스 리본이 달려 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딸은 그 여행 가방으로 엄마를 추억한다. 엄마는 어딘가에 자신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썼지만, "그런 것치곤 어머니는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그 생각에 지금도 웃음 짓고, 엄마와 함께했던 여정을 기억하며 가슴 벅차한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그 엄마' 박완서 작가의 타계 14주기를 기념해 나온 여행 산문집이다. 딸 호원숙 작가가 "모두 우연히 발견했다"는 박완서 작가의 다섯 편의 글이 새롭게 실렸다. 지금껏 책으로 엮인 적 없는 미수록 원고다. 이들 원고에 더해 2005년 발간된 '잃어버린 여행가방'(실천문학사)이 재편집됐다.
'한국문단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박완서 작가는 2011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편·장편소설, 동화, 산문집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이 책은 작가가 생전에 잠실에 살았을 때 제일 가까워 "단골로 다녔다"는 남한산성, 강릉을 비롯해 중국 만주, 백두산, 상해, 몽골, 바티칸, 에티오피아, 티베트 등 나라 밖까지 다녀와 남긴 여행기다. 여행지는 달라져도 저마다의 기쁨, 행복에 더해 인간에 대한 성찰이 큰 물줄기처럼 흐른다.
새로 담긴 미수록 원고이자 가장 처음 실린 '겨울나무 같은 사람이 되자, 삶의 봄을 만들자'는 제목의 글은 작가의 시선을 따라 남한산성을 걷게 한다. 밀집한 아파트 단지에 묻혀버린 역사의 자취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단지 '감상'만 해야 하는 안타까움은 산 아래 도시와 달리 여전히 남아 있는 눈 위에서 깔깔대는 어린아이에서 찾은 환희로 연결된다. 잔잔한 강처럼 흘러가는 감정선은 곧 '삶의 다채'인 듯하다. 그 길을 읽으며 함께 걷는 우리에겐 어둠과 추위를 견디고 맞이하는 새해의 마음을 다잡게 한다.
장소가 바뀌어도 작가의 시선은 한결같이 따뜻하다. 유니세프 방문단 자격으로 찾았던 몽골에선 취학, 위생, 식수 문제 등으로 사는 것은 판이하지만 우리와 똑 닮은 민족을 향해 애정을 전한다. 그 마음을 함께하는 것은 '여행자'가 된다는 의미를 새기게 한다.
"될 수 있으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까지 잊어버리고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중략) 그저 부드러운 시선으로 남의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즐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새로운 경험이 될 터였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중국 만주 기행' 중) 문학동네. 1만6800원. 김지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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