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17] 3부 오름-(76) 단산, 바위 벼랑이 심한 등성이가 평평한 오름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17] 3부 오름-(76) 단산, 바위 벼랑이 심한 등성이가 평평한 오름
기상천외한 해석, 쪼갠 대나무로 짜는 '바곰지' 모양

  • 입력 : 2025. 02.25(화) 03:4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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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도 모르고, 없는 말도 지어내고

[한라일보]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3121번지 일대, 표고 158m, 자체높이 113m다. 바굼지오름, 단산(簞山), 파군산, 파군산악(破軍山岳)으로도 부른다. 남제주군 고유지명이라는 책에 따르면 바구리, 바구미 등으로도 불렸다. 단산(簞山)이란 지명은 한자 그대로 풀면 ‘바구니산’이다. 이 오름이 박쥐를 닮아 박쥐를 일컫는 바구미라고 했는데, 음이 비슷한 ‘바구니 단(簞)’을 쓰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이다. 이후 변형되어 바구니, 바굼지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로 왔던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는 파군산악으로 표기했다. 이런 내용을 살펴보면 이 오름은 옛날엔 바구리 혹은 바구미로 불렸던 것 같다. 그런 것을 발음이 비슷한 바구니로 오인하여 바굼지로도 불렀다고 보고 있다.

단산은 산등성이가 평평한 형태다. 김찬수

바굼지는 바구니의 제주 방언이나 원래 ‘바구미’였던 것이 ‘바굼지’와 혼동되어 한자표기도 ‘簞山(단산)’으로 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명도 있다. 이 산은 박쥐의 모양과 흡사하다. 일본 아이누족 말에 박쥐를 ‘바구미’라고 하는데 바구미는 옛날 퉁구스족이 쓰던 말로 지금도 아이누족의 말로 남아있다고 한다. 한자 이름 파군산(破軍山)은 바굼지오름을 한자의 음을 빌어 표기한 것이다.

이상은 제주도가 발행한 제주의 오름이라는 책의 내용이다. 이 내용 중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일본 아이누족 말에 박쥐를 바구미라 한다던가 퉁구스족이 쓰던 말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은 의아한 내용이다. 사실 아이누어나 퉁구스어에 이런 말은 찾을 수 없다.



단산이 바구니를 닮았다는 해석, 누가 믿을까요?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 파고산(把古山)이라고 기록된 것을 시작으로 1601년 남사록에 파고천(把古泉), 1653년 탐라지 등에 단산(簞山), 석천(石泉) 등으로 기록했다. 그 외 여러 문헌에 파군산(破軍山), 파군산악(破軍山岳), 파고악(把古岳),문단산(文簞山), 문점산(文簟山), 점산(簟山), 바구니오름으로 표기하였다. 이 내용 중 문점산(文簟山)과 점산(簟山)의 ‘점(簟)’은 ‘단(簞)’ 오기로 보아 이를 모두 ‘단(簞)’으로 읽고, 파군산악(破軍山岳)은 파군산에 ‘악(岳)’이 덧붙은 것으로 보아 역시 중복이므로 제외하면, 단산(簞山), 파고악(把古岳), 파군산(破軍山), 문단산(文簞山), 석천(石泉) 등 5개가 된다.

단산은 곳곳에 벼랑이 발달한 지형을 갖는다. 김찬수

이 지명 중 단산(簞山)은 ‘단(簞)’이 ‘바구니 단’이므로 ‘바구니’라는 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파고악(把古岳)은 ‘파고오름’을 표현하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름이라는 뒷부분을 빼면 ‘파고’를 표현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파군산(破軍山)은 ‘파구’에 관형격 어미 ‘ㄴ’이 붙은 형태로 보면 ‘파구산’이라고 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역시 ‘파구’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단산의 ‘단(簞)’ 역시 ‘바구니’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바구’를 표현하려고 동원한 것이다.

따라서 단산(簞山), 파고악(把古岳), 파군산(破軍山)에서 보이는 ‘바구’, ‘파고’, ‘파구’가 무엇을 지시하는 지가 본질이 된다. ‘바구니 단’이므로 바구니 같다는 뜻이라는 해석하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격이다. 이 오름의 어떤 점이 바구니를 닮았다는 것인가. 개인의 감상을 억지로 갖다 붙이는 식의 해석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오름의 지형이 쪼갠 대나무로 짜는 ‘바곰지’, 바굼지(대바구니)와 같다는 데서, 또는 땅에서 바굼지 만큼 솟아 있다는 데서 붙인 것이라는 설명을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제주 고대인, 바위 벼랑을 ‘바구’, ‘파고’, ‘파구’라 해

문단산(文簞山)이라는 지명 해독 역시 문제가 있다. 여기서 ‘문’을 민둥산이라는 뜻의 ‘믠’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이 오름 지명에 ‘산(山)’이 줄기차게 따라붙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오름은 산등성이가 평평한 특성을 보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고대어에서는 ‘ᄆᆞ르’라 했을 것이다. ‘ᄆᆞ르’는 ‘미’, ‘뫼’로 축약이 되고, 이는 ‘산(山)으로 차자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렇다면 ‘ᄆᆞ르파고’로 재구할 수 있게 된다.

석천(石泉)이란 지명에도 깊은 뜻이 숨어있다. ‘석(石)’은 돌로 된 산이라는 특성을 담고자 ‘돌’이라는 훈독자로 썼을 것이다. ‘천(泉)’은 ‘샘 천’이다. 이 글자는 고대어 특히 고구려어에서 ‘미’로 읽었다는 점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미’라는 말은 ‘ᄆᆞ르’가 축약하면 이렇게 발음이 된다. 전 회에서 설명한 오라동의 민오름은 이렇게 기원했다. 석천(石泉)이란 지명은 ‘ᄃᆞᆯ셈ᄆᆞ르’였던 것이 ‘돌세미미’를 거쳐 ‘돌미’가 되고, 이 말은 결국엔 석천(石泉)으로 표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오름에 세미물이라는 샘이 있어 붙은 지명이다.

그렇다면 이 오름 지명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바구’, ‘파고’, ‘파구’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대바구니가 아니다. 고대어로 바위 벼랑을 지시한다. 구체적으로 퉁구스어에서 기원한 말이다. 제주어에서는 지명에만 남아있지만, 국어의 바위, 일본어에서는 베키(ぺき, 절벽)로 분화했다. 이 오름을 ‘바구리’라고도 했는데, ‘바+구리’의 구조다. 바위의 고대어 ‘바’, 절벽의 고대어 ‘구리’의 합성어다. 역시 퉁구스어 기원이다.

제주도 고대인들은 이 오름을 대바구니로 본 것이 아니다. 같은 이름의 오름이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에도 있다. 바구니를 엎어놓은 형태에서 유래한다지만 같은 뜻이다. 단산 혹은 파군산이라는 지명은 바위 벼랑이 심한 등성이가 평평한 오름이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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