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멜팅 포인트
  • 입력 : 2024. 12.02(월) 01:2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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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

[한라일보] 희망은 발음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기 어려운 단어다. 힘주어 그것을 말할 때는 온 몸의 힘을 다 써야 하고 입가의 진동을 참아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린다. 나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데 타인에게 그 단어를 권할 때는 여러차례 주저하게 된다. 절망을 가까이 둔 누군가의 삶에 힘을 내, 힘을 내자고 힘겹게 말하게 되는 건 그 단어의 무게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말하는 것만이 그것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침바다 갈매기는]는 희망이 절망의 반대말이 아니라 절망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이들이 서로에게 새긴 각인의 낱말임을 보여주는 영화다.



쇠락한 어촌 마을의 풍경 속에는 각기 다른 절망의 얼굴을 간직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축축한 바람을 맞으며 일을 나선 늙은 선장 영국과 젊은 어부 용수의 일터는 넓고 아득한 바다다. 그 바다의 한 가운데에서 도무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용수는 그만 바다에 빠지고 영국은 그런 용수를 구해낸다. 망연자실한 용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영국의 두 눈에는 어쩐지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것만 같다. 용수의 처 영란은 타국에서 온 사람이다. 영란의 시어머니인 판례는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몸이 불편한 처지다. 영란은 고향의 식재료인 고수를 좋아하고 판례 또한 영란의 입맛에 어느덧 익숙해져 있다. 영란을 바라보는 판례의 눈 속에도 일렁이는 물결이 있다. 판례와 영란, 용수와 영국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한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 이들은 단란한 가족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 서로가 가진 절망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내가 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불도저를 탄 소녀]를 만들었던 박이웅 감독의 신작 [아침바다 갈매기는]을 보며 두 차례 크게 울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를 내면서. 한 장면은 울라고 만든 장면이 아니었는데 갑작스레 울음이 터져버렸고 다른 한 장면은 배우의 속도를 따라가면서 눈물이 흘러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 였다. 슬퍼서는 아니었다. 희망을 말하기 위해 절망의 단면들을 찬찬히 살피고 더듬는 이 영화에는 신파가 끼어들 틈이 없다. 바다가 고요하지 않은 것처럼 삶 또한 녹록치 않다. 함께 있어도 외롭고 홀로 있으면 고독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의 고된 하루 씩이 펼쳐지는 영화가 [아침바다 갈매기는]이다. 영국과 용수, 판례와 영란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전통적인 가족 관계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용수는 판례의 아들이고 영국과 영란은 혈연 관계가 아니지만 이들은 부자와 모녀 지간 더 나아가서는 서로의 속내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동반자로 느껴진다.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타인의 세계를 받아 들이는 방법은 각자가 지닌 마음의 주름들을, 짓물러 굳어지지 않는 상처의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영화는 어떤 상황에서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묵묵하게 인물의 표정과 움직임을, 쓸쓸한 등과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 까지를 목도하는 것으로 극화된 인물들의 외피에 정성스레 내피를 덧대는 영화다. 이러한 태도를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견지한 박이웅 감독의 힘 있는 연출과 함께 윤주상, 양희경, 박종환, 카작 네 배우의 연기 앙상블 또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젊은 세대의 현실과 고민을 가장 잘 보여주던 독립영화 씬의 2024년은 시야의 스펙트럼을 넗힌 인상적인 작품들로 연달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첨예한 화두들을 폭 넓은 세대의 이야기로 아우르며 단단하고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장손], [딸에 대햐여]와 함께 관객들의 기억에서 쉬이 잊히지 않을 또 한 편의 올해의 독립영화로 여러 차례 호명될 것이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에서 나를 처음으로 울린 장면을 마주했을 때 나는 신기하게 스크린 속에 들어가 그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동행이 된 기분이었고 내 등에 판례의 맵고 뜨거운 손이 와 닿는 이상한 실감을 헸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파열음이 내 입으로 터저 나올 때 그 뭉개진 말의 실체가 어쩌면 희망의 다른 발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차갑고 시린 삶의 절망들을 기어코 녹이는 이 영화의 뜨겁고 매운 순간들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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