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98)빙산의 일각-김명인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98)빙산의 일각-김명인
  • 입력 : 2024. 12.31(화) 03: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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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산의 일각-김명인




[한라일보] 복약을 줄여주겠다며

담당 의사가 처방전에서 알약 한 개를 뺀다

호전일까, 그래봤자 다섯에서 넷,

따로 처방 받은 두 알이 있으니 지병의 목록은

요량보다 장황하다, 요즘 일과는

좁힐 대로 좁혀놓아

두세 시간 책읽기가 고작,

산책도 외출도 삼가니 무문에 든 듯

삼시 세끼 공양만 불쑥불쑥 디밀어진다

생각거니 그동안이 세끼 밥상머리에 앉으려고

불러들였던 세월 같고, 그 밥상 둘러엎으며

처연했던 나달 같고

살아내는 질 하도 여럿이라서

읽히는 쪽이 빙산의 일각이라니!

세상에 왔다 가는 사정은

물도 아니고 색도 아닌

그저 흐리멍텅한 물색이라는 생각,

여명이 회색빛으로 번지다가

이내 깜깜해질 이 박모(薄暮)에!

삽화=배수연



해가 진 뒤 깜깜한 어둠이 깔리기 직전 박모에 시인은 마침내 말한다. 삶은 "흐리멍텅한 물색"으로 귀결된다고. 생의 활동이 위축되고 제한되기 시작하는 초로(初老)에 적막은 복약과 밥상머리를 감돈다. 초록에서 초로까지의 물맛이 여럿이고, 숱한 바다와 강을 산책한 시인에게 물색 또한 적지 않건만, 마음의 행로는 어느새 멀리 떠나온 자신의 주변을 바라보는 일에 와 멎는다. 그게 빙산의 일각이다. 녹지 않고 얼음덩어리로 떠도는 응축된 일각, 그 형상은 시의 상징이자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삶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그 일각의 두께엔 여명에서 박모로 표변하는 삶과 무수한 공(空)이 들어 있다. 태어난 울진의 바다에서 젊음의 열락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 의 아픔으로 가득했던 등단작품 '출항제'를 가지고 겨울의 부두를 떠나던 그는 이제 그 모든 물색을 일일이 정의하지 않으며 두문불출, 흐리멍텅한 무채색으로 돌아와 앉는다. 미답의 깊이까지 내려갔다 온 시 한 줄을 들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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